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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2월의 유혹
지은이 모희준 감상료 0 원 출판일 2010-07-07 감상횟수 1812

 

 

12월의 유혹

 

by 줄리안

 

#1

 

 

그렇게 서른두 번째 12월이 나를 찾아왔다.

그 여자는 내 맞은편 테이블에 혼자 앉아 계속 전화통화를 하는 중이다.

실장님. 죄송해요. 다른 전화를 좀 받았어요. 친구요. 주말에 일본에 좀 다녀왔어요. 네. 일본이요. 신랑이랑 같이요. 어제 도착했어요. 네. 제가 오늘까지 휴가예요. 맞아요. 휴가를 받을 때도 됐죠. 실은 실장님에게 드릴 선물을 하나 사왔어요. 일본에서요. 사무실에서 드리기는 좀 그래요. 아시잖아요.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고. 커피 전문점이요. 혜화동에 있는. 혼자예요. 커피 마시고 있죠. 에스프레소. 신랑이요? 오늘 야근이래요. 야근이 좀 잦아요. 바쁜가 봐요. 지금…여섯시 좀 안됐어요. 오 분 전. 알아요. 신랑은 열두 시쯤 들어 올 거예요. 전에도 그렇게 들어왔어요. 친구 좀 만났다고 하면 돼요. 정숙이. 알죠? 전에 만났었잖아요. 맞아요. 좀 통통하고. 그 친구 만나러 간다고 했어요. 몇 시요? 기다릴 수 있죠. 커피 마시면서 책이나 읽고 있으면 돼요.

여자는 통화가 끝나자 오른쪽 귀를 덮고 있는 검정색 곱슬머리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종료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또 다른 번호를 누르고 다시 전화기를 머리카락 속으로 파묻는다. 카운터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커피를 주문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맨 앞에 서 있는 노트북 가방을 둘러 맨 남자가 메뉴를 고르고 있다. 그 뒤로 한 쌍의 남녀가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남자는 여자에게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고 여자는 앞에서 메뉴를 고르고 있는 노트북 가방을 맨 남자를 쳐다보고 있다. 꼭 이런 곳에서 이야기를 해야겠어? 여기는 너무 시끄럽잖아. 어디 조용한 곳에서 술이나 한 잔 하면 안 될까? 내가 괜찮은 곳을 알고 있는데. 거기서 다 설명할게.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너도 알잖아? 알긴 뭘 알아 병신아. 그냥 여기서 말해. 그 순간 갑자기 밖에서 자동차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소음에 파묻힌 음악은 멜로디만 간신히 들리고 있고 누군가가 커피를 주문하면 점원은 그 주문 커피 명을 약간 목소리에 힘주어 전달한다. 카드 명세서가 인쇄되는 소리. 주문하신 카라멜 마끼아또 두 잔 나왔습니다. 목이 터져라 남자 점원이 외친다. 청색 오리털 점퍼를 입고 비니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카라멜 마끼아또 두 잔을 위태롭게 들고 자리로 돌아온다. 그는 내 옆 테이블에 침울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는 한 여자 앞에 쟁반을 내려녾으며 앉는다. 여자의 옆에는 쇼핑백 두어 개가 놓여 있다. 어디 아파? 침울한 표정의 여자가 묻는다. 아니. 남자가 대답한다. 그는 조금 지쳐보인다. 아프면 말해. 안 아파. 그런데 왜 나를 똑바로 못 봐? 뭘 똑바로 못 봐? 즐겁게 쇼핑했잖아. 너만 즐거웠지. 너 내 얼굴 좀 봐. 씨발, 설탕을 다 부어버렸잖아. 그게 내 탓이야? 널 보려다가 그런 거야. 커피 맛이 왜 이래? 나 좀 봐. 뭐가 문제야? 힘들어서 그래? 야. 여기 커피 좆같은데 다른 데로 가자.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린다. 여자는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한동안 쳐다보다가 쇼핑백을 손에 들고 그를 따라 나선다. 야! 같이 가! 히터의 열기와 체온이 뒤섞여 가슴이 답답하다.

 

그리고 바닐라 향이 나를 스쳐지나간다.

 

그 바닐라 향은 내가 전에 만났던 어떤 여자를 연상시킨다. 수희.

수희와 나는 2002년도 월드컵 경기 열기가 한창이었던 때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서 처음 만났다. 한국과 이탈리아 전이었으니 6월 18일쯤 됐으리라. 광화문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열광했고 우리는 그 뜨겁던 열기의 일부분이었다. 그 열기를 타고, 바닐라 향이 났다. 수희. 내가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보았던 낯선 여자. 그리 예쁘지도, 그렇다고 매력적이지도 않았지만 바닐라 향이 났던 여자. 우리는 두 번 섹스를 했고 그녀는 임신을 했다. 나에게 20만원을 빌려 아이를 지우고 그 이듬해 그녀는 자살을 했다. 내게 있어 자살이란 이상주의자들이나 하는 할복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지우기 위해 그녀가 내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을 때, 나는 그녀가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녀는 이상주의자였다. 수희는 내게 20만원을 갚지 않은 채 죽었지만 유서에 내 이름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마도 내가 그녀의 자살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고 수희는 생각했나보다. 그녀의 그런 배려가 돈 20만원의 가치를 맴돌며 가늠됐고 자꾸만 그 사건은 그 돈과 함께 떠올랐다. 그녀의 유서에 내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면 그 돈은, 내게서 빌려간 그 어처구니없는 돈은 고통을 안겨주며 머릿속에 그토록 오랫동안 번져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희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나를 뒤흔들어 놓고 있으며 그 이후로 바닐라 향을 가진 여자를 다시 만난 적은 없다.

 

바닐라 향이 나는 그녀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던 여자가 앉았던 자리에 앉는다. 테이블 위에 거품이 가득 부풀어오른 머그컵을 내려놓고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낸다. ‘그 달은 일요일뿐이었다’라는 제목의 책이다. 대학 도서관의 직인이 찍혀 있고 표지 귀퉁이 부분이 접혀 있다. 나는 그 책의 제목에 마음이 끌린다. 그녀가 풍기는 바닐라 향에도.

그녀는 코트를 벗어 바로 옆자리에 걸쳐놓는다. 커피 위에 눈처럼 쌓인 거품을 냅킨으로 걷어내고 설탕 한 봉지를 넣는다. 빨간색 스틱으로 잔을 휘젓다가 반쯤 마셔본다. 맛을 본 후 설탕 한 봉지를 더 섞는다. 느긋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그녀는 책을 펼친다.

오래된 책만이 풍기는 특유의 냄새가 바닐라 향과 함께 뒤섞여 나를 흔들고 있다. 그녀의 입술에 가늘게 묻어 있는 크림이 흰 빛줄기처럼 빛난다. 2002년도의 광화문 광장처럼 열광적인 분위기로 인해 일었던 흥분은 아니다. 다만, 수희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 어떤 유혹은 12월 어느 날에 찾아와 내 가슴을 노크한다.

그 유혹은 충동이었으며 준비되지 않았던 시절에 대한 되새김질이었다. 충동이란 순간이며 순간은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머뭇거리지만, 유혹은 너무도 갑자기 바닐라 향과 함께 찾아와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바닐라 향이 나는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책을 읽고 있다. 가끔 펜과 수첩을 꺼내 뭔가를 적기도 한다.

그녀는 책에 몰두한다.

나는 그녀와 책을 곁눈질한다. 그녀가 나의 곁눈질을 눈치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인다.그런 마음이 수희에 대한 미련에서 시작된 것처럼 말이다.

나는 눈을 감고 미간을 가운뎃손가락으로 주무른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는 조금 무리를 했었지. 피로가 갑자기 밀려왔다. 피로는 내 이성을 무디게 하고 충동만을 자극한다. 저 여자에게 말을 걸어봐. 유혹해보라고. 2002년의 그날처럼 말이야. 혹시 알아, 오늘밤 바로 섹스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지. 두 번. 내 아이를 임신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결혼하는 거야!

뭐라 말을 붙이지. 그냥 바닐라 향이 난다고 말해.

 

“입술에 크림이 묻어 있네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안경 너머로 그녀의 커피 색 눈동자가 보인다. 그 눈동자 안에 내가 있다.

“뭐라고 하셨나요?”

“입술에 크림이 묻었어요.”

“아.”

그녀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문지른다.

“고마워요.”

“별 말씀을요. 그런데 학생이신가 봐요?”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쳐요.”

그녀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한다. 미소와 바닐라 향을 머금은 채.

“그렇군요. 뭘 가르치시죠? 국문학? 영문학?”

“왜 제가 국문학이나 영문학을 가르칠 거라 생각하시는 거죠?”

나는 손가락으로 책을 가리킨다. 그녀는 내 손가락 끝을 잠시 동안 바라보다 비로소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경영학을 가르쳐요. 사실 이 책은 재미가 없어요.”

“무슨 내용인데요?”

“불륜을 저지른 목사의 이야기죠.”

“흥미로울 것 같은데요.”

“글쎄요. 모든 불륜이 흥미롭지만은 않아요.”

“하지만 목사잖아요?”

“목사도 인간이고 불륜은 다 똑같아요. 지루하죠. 그런데 댁은 이 책이 흥미로운 건가요? 아니면 제가 흥미로운 건가요?”

그녀는 검정색 뿔테 안경을 벗으며 묻는다.

그녀의 자그마한 몸은 이제 완전히 내 쪽으로 쏠려 있다. 그녀가 읽던 책의 페이지가 다른 여러 책장에 뒤섞여버린다.

“그냥 입술에 크림이 묻어서 알려주려고 했을 뿐이에요.”

“제 입술에 크림이 언제부터 묻어 있었는데요?”

“십오 분 전부터요.”

“그러면 십오 분 전부터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는 말이네요.”

“어, 눈에 거슬렸거든요.”

“제가요?”

“크림이요.”

그녀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손등으로 입술을 닦는다. 마치 같은 실수는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는 나를 자신의 눈동자 속에 가둬 놓고 내 진심을 알아내려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내가 처음 말을 걸었을 때 대답을 해준 것에 대해 후회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자 그 안에 있던 내 모습도 흔들린다.

 

 

-계속

<2회부터 유료. 해당 작가 작품에서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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